80년 서울의 봄이 햇볕이 드나 싶드니 광주사태로 정국과 미술계는 안개로 뒤 덮였다. 그리고 뚫렸던 봇물은 정국이 경색되도 막힐 수 없었다. 홍성담의구속 (광주사태의 잔학상을 그림으로 표현했다해서 )신학철의 모내기그림사건 오윤의죽음등 그리고 민중계열계통의 그룹이나 작가들이 줄줄이 감옥으로 갔다.그래도 그네들은 한강미술관 서울미술관 그림당민에서 전시또는 당국의 감시를 받았다. 쫓기고 쫓는 세월이 지나갔다. 어떤화가는 그네들의 방해로 갑자기 직장을 잃었다.그러나 그들의 용기에는 권력의 강권도 소용없었다.부부가 직장을 잃고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부부화가도 내가 보았다. 6,29가 지나서야 감옥에서 또는 음지에서 작품활동을 하던작가들이 막혔던 봇물처럼 전시회가 그림당민 서울미술관 한강미술관 학고재등에서 전시회가 연이어 열렸다.
새로운 콜랙터 미술기자 평론가들이 인사동과 구기동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때 이호재라는 젊은 사장이 새로운 스타일의 화랑을 개관하고 우찬규사장도 학고재화랑을 개관하고 민중계열작가들을 집중발굴 전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나는 그당시 전혀 제도권에 참여하지않고 묵묵히 작업하던 민중계열작가 권순철의 전시회를 가졌고 학고재는 민족 미술작가가상을 창설하고 신학철을 제1회 수상작가로 선정하고 기념전을 가졌다. 81년 미술화관에서 임옥상이 아프리카 현대사를,그리고 후에 호암아트에서 중앙일보 초청으로 초대전을 열어주었다. 이당시 중앙일보 편집자와 미술기자단과의 자중지란의 대격돌이 있었다. 같은 신문사에도 찬반으로 갈려서 대논쟁이 있었으니 """""""""""""".
화랑도 미술가도 평론가도 신구계열의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프랑스의 19세기를 보는 느낌이었다.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을 보는 느낌이었다. 예술의전당 미술관장에 윤범모가 선정되고 민중미술의 정신적 지주인 김윤식교수 원동석교수등이 전면에 떠오르고 유홍준 김용태 성완경 최열 박영택 이영철최태만등의 새로운 미술평론가들이 발돋음하는 계기가 되었다. 외국에 나가있던 화가들도 인사동과 미술관에서 전시회가 연이어 열리기 시작했다.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올림픽관계로 일약 세계적 관심작가 부상)구상과 추상을 엮음으로서 세계적 관심을 모았던 하모니즘의 창시자 김흥수 프랑스에서 한국인의 자존심을 일깨웠던 손동진 문자로 기호학의 동양정신을 그린 이응노 한묵 이항성한봉덕 정상화 물방울의 작가 김창열 남관 한국최고의 조각가 문신등 한국의 거목 예술가들이 전시하는 계기가 되었고 처음 국내에 언론이나 뉴스로 접한 그림을 보는 계기가 되었다.
홍성담작.
광주사태회상작.-가자 도청으로.
1991년 제1회 민족미술상 수상 1999년 금호미술상 수상
황재형작....창틀에 아크릭릭...백석의시..."주막에서"를 그림으로 표현..... . 김홍주.
김정헌.
파리에서 돌아온변종하.-1987년뇌경색으로 돌아가다.
<서정적 풍경 / 1985 / 부조에 유채 / 32.5x41.5 cm>
김창열-민족의 역사를 물방울로 표현하다.
기억, 1975, 신문지에 유채.
물방울SH87007, 1986. 김흥수.
천경자.
군상 foule 김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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