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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그리고 슬픈 일들

[한명숙 미니자서전 2] 긴 연애, 짧은 결혼

by FELUCCA 2008 2009. 12. 14.

[미니자서전 2] 긴 연애, 짧은 결혼

2008/03/20 11:37 | Posted by 한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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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남편 박성준을 만난 것은
대학 3학년 때이다. 나는 당시 이화여대와 서울대의 기독교 학생연합 단체 ‘경제복지회’에서 마르고 껑충한 박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는 연합 써클의 회장이었고 나는 부회장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숨긴 채 회장과 부회장이라는 표면적인 이유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가까워 질 수 있었다.

‘경제복지회’는 성서를 통해 현실과 사회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하는 대학생 연합단체였다. 나는 남편을 통해 시대의 아픔과 사회의 현실에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믿음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어 왔던 나에게 남편은 내가 미처 몰랐던 성서의 참의미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나는 비로소 참 신앙은 개인의 영적체험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며 사회참여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 실현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난 점점 남편의 철학과 삶의 태도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미 둘의 마음은 충분히 전달되고 있었다. 문제는 누가 먼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느냐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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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꽁꽁 숨겨 놓은 감정을 은근 슬쩍 고백한 것은 남편이 아닌 나였다
. 이화여대에서는 해년 마다 개교기념 축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이른 바 ‘쌍쌍파티’ 였다. 당시 이대생들은 쌍쌍파티의 파트너가 누구냐가 가장 큰 관심사의 하나일 정도였다. 나는 남편 박성준에게 파트너를 신청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축제장으로 들어서는 깡마르고 좁은 그의 목에 매어진 빨간 넥타이. 남편 역시 자신을 파트너로 신청해주길 손꼽아 기다렸던 것이다. 공식적인 첫 데이트였으며 우리의 연애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4년간의 길고 짙은 연애였다. 우리는 서로 뜨겁게 사랑했으며 사랑의 불꽃이 뜨거워지는 만큼이나 나는 남편을 통해 점점 사회문제와 조국의 현실에 눈을 뜨고 있었다.

당시 군사독재에 저항한다는 것은
개인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는 것은 물론이며 목숨까지 걸어야할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러한 위험한 결정임에도 내가 기꺼이 민주화 운동에 뛰어 들 것을 결심한 것은 남편의 열정적인 가르침에 힘입은 것이다. 연애를 시작한 지 4년 만에 드디어 우리는 평생을 함께하기로 했다. 우리의 결합은 동지와 동지의 연대였으며 믿음과 사랑의 결합이었다. 1967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한다는 서약과 함께 결혼식을 올렸다. 그야말로 꿀과 같은 신혼생활이었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단어를 채 익히기도 전에 신혼의 단꿈은 무참하게 깨어져 버리고 말았다. 1968년 7월. 남편이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고 말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