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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그리고 슬픈 일들

[한명숙 미니자서전 8] 쏘지마! 쏘지마!!

by FELUCCA 2008 2009. 12. 14.

[미니자서전 8] 쏘지마! 쏘지마!!

2008/03/20 11:34 | Posted by 한명숙

전두환 군사정권 말기 87년 2월. 한국의 진보적 여성운동은 민주화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드디어 전국 21개 민주여성단체가 연합하여 ‘한국여성단체연합’을 결성했다. 여성연합은 이후 진보적 여성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며 민주화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전두환 독재정권의 마지막은 처절하고도 뜨거웠다. 군사독재를 타도하고 개헌을 통해 국민의 권리인 직선제를 쟁취하기 위한 민중의 염원이 솟아오르는 활화산처럼 뜨겁게 타올랐기 때문이다.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당한 물고문 치사 사건은 민중 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박종철의 죽음은 분노한 민중에 분노의 불을 지폈다. 각계에서 연일 성명서가 발표되고 학생, 노동자, 여성, 교수, 교사, 변호사, 사무직 노동자, 종교인, 일반시민까지 고문 폭력정권 타도와 직선제 개헌을 외치는 목소리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 해 6월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대규모 시위가 거리를 뒤덮고 있었다. 남편과 나도 두 살짜리 아들 길이를 어머니에게 맡겨 둔 채 거의 매일 시위에 참여했다. 남편은 자신이 목회자로 있던 문중교회 멤버와 시위에 참가했으며 나는 여성단체 회원들과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당시 여성단체 회원들은 머리에 삼베수건을 쓰고 거리를 행진했다. 삼베는  죽음에 대한 애도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죽음과 정권의 폭력에 의해 살해당한 박종철군에 대한 애도의 상징이었다. 이후 삼베수건은 구속자 어머니들의 시위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민주열사들의 장례식, 일본군 위안부 시위 등 민주화 투쟁의 상징처럼 되어버렸다. 

거리는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민의 함성과 이를 진압하려 폭력정권이 쏘아대는 최루탄 그리고 이에 맞선 학생들의 돌과 화염병과 투척으로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여성연합은 이러한 폭력적 시위 문화를 평화적 운동으로 변화시키기로 결의했다. 그 일환으로 6월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정하고 그 날의 시위를 여성연합이 주도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87년 6월 18일, 파란 초여름의 하늘 위로 울려 퍼지던 그 날의 함성을 생각하며 아직도 콧날이 시큰거린다.

6월 18일. 여성연합회회원들은 구속자 어머니들과 함께 수 백 개의 빨간 카네이션을 준비했다. 그리고 우리는 시위대의 맨 앞에 섯다. 우리들 뒤로는 수십 만 명의 시위대가 포진하고 있었다. ‘독재타도’ ‘호헌철폐’ 수 십 만의 목소리가 함성으로 변해 종로 한 복판을 쩌렁거리며 울렸다. 좌우의 빌딩에서는 사무직 노동자들이 창을 열어 우리의 구호에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그 순간 종로 네거리로 수 천 명의 중무장한 전투경찰들이 진입해 오고 있었다. 갑자기 불어 난 전경들의 위압에 눌려 시위대는 잠시 술렁거렸다. 눈 감짝할 새 우리 여성연합회 회원들 앞으로 수 천명의 전경들이 열을 맞추어 한발자국씩 다가오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우리 여성들은 떨리는 입을 열어 단 세 글자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쏘지마! 쏘지마!!”

하지만 우리의 소리는 너무 작았다. 수십만 명의 구호에 묻혀버리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쏘지마! 쏘지마!!”

그것은 독재와 폭력을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피 맺힌 절규였다. 우리의 외침이 울음으로 바뀌어 갈 때 쯤 우리의 작은 소리는 점점 메아리를 타고 있었다. 조금씩 거세지던 외침은 끝내 하늘을 찌를 듯한 함성으로 바뀌고 있었다. 종로 네거리가 “쏘지 마” “쏘지 마” 우레와 같은 절규로 물결치고 있었다.

수 십만이 외치는 함성을 뒤로 한 채 우리는 한 손에 빨간 카네이션을 들고 한 발씩 전투 경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피곤에 찌들어 무표정한 전경들의 가슴에 한 송이 카네이션을 달기 시작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순간의 고요를 타고 사랑과 용서가 담긴 카네이션 향기는 거기 있는 모두의 가슴에 전율로 와 닿았다. 전투경찰들 역시 평화의 향기에 취해 한동안 최루탄을 쏘지 못했다. 비록 시위대와 전경은 독재정권의 폭정으로 대치하고 있지만 그들 역시 우리의 형제이고 아들이며 살을 부비며 함께 살아가야 할 이 땅의 동포였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내가 꽂아 준 카네이션을 멍하게 바라보던 전투경찰의 크고 순진한 눈망울을 기억한다. 나는 그 날, 그 자리에서 용서의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