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균의 그림은 전체적으로 일관할 때 모더니즘이라는 철교를 건넌 것은 아니다. 철교 아래로 복잡한 산업사회 현실이라는 도도한 강물이 흘러가고 있음에도 그는 주춤거리며 거대한 탁류를 건너가려 하기보다는 고향마을 앞에 흐르는 작고 깨끗한 시냇물에 취해 있는 자기 삶의 그림자들, 강연균식으로 말해서 자연의 리얼리티를 복원하려고 애쓴 것이다. 그는 스스로 리얼리스트라고 말하며 자신의 작품들은 리얼리즘을 추구해왔던 성과물이라고 강조한다. 이 점에 대하여 수긍이 가는 작품들이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의아심을 품을 작품들도 적지 않다.
강연균의 독특한 리얼리즘 미학
우선 미술용어로서 자주 쓰는 리얼리즘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작품으로 드러나 있는가를 검토하고 개념 정의를 합의해 놓지 않는다면, 상당히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리얼리즘(사실주의, 현실주의)의 개념에 대한 사전적 정의, 예컨대 “대상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는 사조”라는 의미만으로는 불충분하며, 그것의 역사 기원, 즉 선사시대부터 고대 헬레니즘, 르네상스미술을 거쳐 19세기 중·후반에 고전주의나 낭만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리얼리즘의 의미가 자리잡기까지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함이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에서 어떤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는가도 살펴볼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 논의는 매우 복잡하며 철학적인 설명도 길게 들어가므로 강연균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범위내에서만 인용할 생각이다. 린다 노클린이 쓴 『리얼리즘』이라는 책에서는 그 개념의 다의성을 세 가지로 정의하고 있는데 a) 묘사와 묘사되는 대상 사이의 완전한 일치를 의미하는 리얼리즘, b)현실적인 대상을 단순히 거울처럼 비추어 모방하는 것을 초월하여 사물 그 자체와 직면한다는 뜻의 리얼리즘, c)이데아를 예증하고 있는 현실적인 사물의 특수하고 고유한 것 모두를 무시한다는 뜻의 리얼리즘 등이다. 즉 그 용어의 사용 범위가 넓고 복잡하며 모순되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이 저자가 예증으로 들고 있는 리얼리즘 작가들의 범위는 리얼리즘의 주창자인 구스타브 크르베로부터 자연주의 농민화가 장 프랑소와 밀레, 인상주의 선두작가 에두아르 마네, 클로드 모네, 르느와르, 드가 등을 포함하여 날카롭게 사회현실을 풍자한 도미에, 구스타브 도레 등 무수한 19세기 작가들이 열거되어 있다. 그리고 좀더 사회현실의 반영과 밀착되면서 비판적 리얼리즘 혹은 사회적 리얼리즘, 자본주의 리얼리즘, 마술적 리얼리즘, 사회주의 리얼리즘 등 20세기 리얼리즘 논쟁의 주도적 확립을 향한 다양한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서양의 근·현대미술사의 관점에서 인식되고 있는 리얼리즘의 폭넓은 의미는 한편으로는 다소 혼란한 오해와 편견을 증폭시키면서도, 또 한편으로 정작 우리가 정립해야 할 논의점을 부각시키고 있다고 할 것이다. 우선 우리에게 좀더 엄밀한 구별이 요구되는 것은 서양의 근대화가 유입되면서 우리의 아카데믹한 화풍으로 자리잡고 양식화되다시피한, 자연풍경과 대상물을 소재로 그린 자연주의와 인상주의를 절충한 양식이 진정한 리얼리즘의 개념에 들어갈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여기에는 우리의 전통산수, 예컨대 정선의 진경산수나 김홍도의 사경산수에서 엿보이는 리얼리즘과의 결합문제도 포함된다. 리얼리즘의 의미가 단순히 묘사와 묘사된 대상의 일치, 거울 같은 반영이라는 통념적 차원을 넘어서서 동시대적 정신이념과 생활의 진실성에 대한 의미파악이며 정서표현이라면, 아카데믹한 절충주의 양식에서는 이러한 리얼리티를 발견할 수 있는가? 서양의 자연주의는 그 시대 과학정신(실증주의)의 발현으로서 그 시대의 진부한 권위주의(관학주의)에 대한 대항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절충주의는 어떤 시대정신의 산물인가? 시대성의 부재는 리얼리즘이 아니다. 말하자면 자연이라는 대상물 그 자체는 역사가 없는 것이지만, 이를 보고 그리는 작가의 눈길, 작가의식은 그 시대 삶과 연관된 역사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어느 정도 농밀하게 나타나 있는가의 여부가 그 작가로 하여금 리얼리스트인가를 읽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에 대한 시대적 해석의 표출이 없는 단순한 재현, 반복, 옛것의 추종, 상투적 되풀이가 리얼리즘이 아니다.
남도화단에는 국전풍의 산수나 풍경화를 통해 향토적인 것을 소재로 삼아 자연주의를 흉내내는 무수한 작가들이 계보를 이룩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강연균이 말하는 리얼리즘은 어떻게 성취되어 나타나 있는가? 따라서 자연에 대한 시대적 해석의 표출이 없는 단순한 재현, 반복, 옛것의 추종, 상투적 되풀이가 리얼리즘이 아니다. 남도화단에는 국전풍의 산수나 풍경화를 통해 향토적인 것을 소재로 삼아 자연주의를 흉내내는 무수한 작가들이 계보를 이룩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강연균이 말하는 리얼리즘은 어떻게 성취되어 나타나 있는가? 우선 그의 작품들이 주로 다루는 소재가 광주라는 도시공간에서 일상적으로 보여지고 느껴지는 도시적 소재물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한다면, 그의 리얼리즘은 자연주의 맥락에 있는 향토성의 추구이다 라고 일단 말할 수 있다. 작가는 도시에 살면서도 도시 외곽의 논, 밭, 산천, 시골마을, 시골사람 등 자연이 주는 정서와 풍물 속에서 인간의 본원적인 아름다움을 찾으려 든다. 그것은 서양처럼 자연에 대한 과학적 실증의 확인 작업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적인 농경 삶이 누려온 자연일치사상이자, 자연조화감정에 대한 무의식적 회귀본능 같은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자연은 한결같지 않다. 더구나 남도적 자연은 북도적 자연과는 다른 유장하고 섬세하고 끈끈한 맛이 있다. 이러한 자연의 빛과 소리, 냄새의 독특함을 자신의 감각으로 느끼며 표현할 때 그것이 남도적 정서맛이 물씬 풍기는 그림들인 것이며, 그 중에도 강연균의 특출함은 남도적 삶의 냄새를 보여 준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인물이 전혀 나오지 않는 풍경화를 비교하여 본다면, 강연균 그림의 자연에는 그 자연에 살고 있거나 살았던 인간 삶의 흔적이 배어 있다. 일찍이 민족주의 회화론을 주창한 오지호 화백은 자연의 기후나 풍토조건이 일본과 다르다는 점에서 칙칙하고 몽롱함을 장기로 여기는 왜색풍의 잔재 청산을 강조하였으며, 그 자신 스스로 청명한 가을하늘의 색채와 같은 투명성, 발랄한 생동감을 보여 주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래서 그의 황풍이 남도의 향토주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러한 자연풍경 속에 깃들어 있는 삶의 자취는 거의 무시되었다. 작가는 그 풍경에 대한 주관적 인상을 표현하든가, 대상과의 일정한 관조적 거리감을 보여 주는 것이 상례였다.
이러한 한계를 딛고 인간 삶의 호흡과 흔적의 상상력을 보여 준 것이 강연균 그림이다. 이 점이 오지호와 다른 강연균의 새로운 자연의식의 접근이다. 그가 늘 좋아하는 무등산을 제외하고 흔히 수려한 명상 같은 소재에 집착하지 않는다. 어디서나 흔히 보는 시골길, 황토빛깔의 밭언덕이나 무너져 내린 산사태의 몰골, 물웅덩이, 돌아보지 않는 수몰지대, 버려진 나무뿌리, 뱃조각이 뒹구는 갯가 등 자연물 그 자체로서는 아름다운 감흥이 일지 않는 것에 그의 시점이 맞추어 있으며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흔적이 묻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이런 평범하고 하찮은 것들이 풍기는 이미지를 통해 맡는 인간 삶의 냄새이다. 가령 그의 <고부 가는 길>이라는 작품을 놓고 볼 때 그것은 질펀한 들판 사이로 나 있는 평범한 달구지 길에 불과하다. 작품 제목이 말한대로 고부다운 길의 특성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이 길 그림에 대해 작가가 보여 주고 싶은 이미지의 하소연은 많다. 우선 자신이 어릴 적 할아버지를 뵈러 찾았던 추억과 항상 허기진 배를 달래며 걷던 아스라한 그리움이 묻어 있는 길이며, 동학군 농민들이 떼지어 갔던 역사를 상기시키는 길이기도 하며(비록 구체적 상황묘사는 생략되었지만), 또한 지금은 농촌을 떠나버린 사람들의 쓸쓸한 길이라는 이미지를, 작가는 침묵의 상상력을 이 길 그림에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길 그림의 연작은 늙은 시골아낙이 짐을 이고 어둑하고 스산한 겨울의 해거름에 걷고 있는 모습을 보여줄 때 더욱 구체적 정황의 분위기로 나타나고 있다.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의 색조를 보여 준 고부 길 연작은 제작 연도가 말하듯이 작가가 80년대 겪었던 시대의 암울성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80년대 농촌현실을 직접적으로 파고듦으로써 비판을 제기하는 주제의식에는 일정한 거리감을 두고 있다. 가령 86년작의 <농경도> 같은 작품은 밭갈이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먼 발치로 내다보는 목가적 풍경으로 그려져 있다는 점에서 농민 삶의 가파름을 끌어당기지 않는다.
다만 그는 80년대 중반 이후 일련의 작품들에서 농어촌의 사람들, 즉 늙은 어부나 시골할머니, 갯가 아낙들, 장터에 모인 서민들을 화면 가득히 부각시키는 작업을 보여 줌으로써 그의 섬세하고 투명한 수채기법이 발휘하는 장기만이 아니라 가난하고 고달프고 소외된 민중 삶의 아름다움을 구현하고 있다. 강연균의 예술, 그 진면목이 드러나는 세계가 이들 수작들에 농축되어 있음을 우리는 본다.
어떤 유화기법의 치밀한 묘사로도 맛을 낼 수 없는 수채기법의 섬세한 농담과 투명성의 효과는 이들 얼굴 표정의 잔주름이며 손등의 핏줄, 입고 있는 옷이나 머리에 쓴 수건의 색깔 그리고 무늬가 질감까지 사실감 있게 보여 준다. 작가로서 깊은 애정의 시선이 닿지 않고서는 보여 주기 힘든 민중 삶의 초상화는 구태여 이념의 선명성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도달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을 입증한다고 할까? 이 점 그의 민중상은 평범한 농어민적 생활정서 속에서 드러나는 이미지를 중시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리얼리즘은 변혁의지나 투쟁성을 강조하는 리얼리즘, 그가 자주 비판적으로 말하는 운동미술의 논리와 다르다. 다시 말해 예술가치로서 심미성의 결합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측면을 보여주는 그의 작품은 그의 심미적 만족감을 충전한다고 하는 정물화와 누드화이다. 특히 그의 누드 그림은 일반대중들에게 가장 인기를 끄는 감상품목의 하나이다. 그의 탄탄한 인물 데생력은 오랫동안 누드 크로키를 바탕으로 이룬 실력이라고 할 정도로 그 방면의 깊이와 독특한 정조를 보여 준다. 이 점은 85년 『강연균 크로키집』을 처음 발간하면서 태산백화점 미술관에서 크로키전을 열었을 때 전부 판매되었다는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수채기법에 있어서의 변주곡, 가령 번지기 기법이 풍경화보다도 누드화에서 더 재미있게 시도되고 있을 정도로 그는 이 장르에 대한 애착을 갖고 있다. 강연균이 젊은 여인을 모델로 삼은 누드화는 한국적 여인의 몸매와 살결의 부드러움을 그의 수채기법에 의해 맛보게 하는 최적한 표현을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 누드는 생명적 본능의 아름다움과 우주적 신비를 감추고 있는 무엇이며 또 다른 의미의 낙원이다
가령 <두 여인>을 그린 벌거벗은 육체의 황홀한 자태는 이상적 자연을 배경으로 삼는 낙원의 모습이다. 여기서는 어둡고 쓸쓸한 자연의 리얼리티나 역사적 현실을 상기시키는 것이 없다. 그가 정물화로서 즐겨 그린 둥근 박 색깔의 질감이나 잘 익은 석류 껍질을 트고 나온 루비 같은 알맹이들처럼 누드는 생명의 자연성을 간직한 존재일 따름이다.
여인의 누드는 자연의 그것처럼 정물적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이 점에서 그는 여성 숭배적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 물론 여성해방의 현실논리와 다른 차원의……. 5월항쟁의 처참한 살육의 현장을 체험한 시인 김준태는 어느 날 강연균의 누드화를 바라보는 순간에 펑펑 쏟아지던 눈물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솟구치는 생명에의 그리움을 순진무구한 누드가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현실을 상기하는 리얼리티가 아니라 하나의 별빛 같은 것이다. 진정한 리얼리즘은 육체의 추악함이나 냉혹함을 덮어두지 않는 정신과 자세에서 나온다. 쿠르베가 그린 억세고 질긴 고깃덩어리 같은 누드그림을 본 순간 혐오감을 느낀 황제가 채찍으로 갈겼다는 일화 속에서 우리는 리얼리즘의 깊은 의미를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작가의 누드그림에서는 육체적 자연으로서 생명미의 추구, 감상적 찬미는 있었으나 누드를 통한 직각적이며 사회적인 현실감의 천착이나 삶의 음미가 아직 없는 셈이다. 그러나 강연균에게 이런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82년도에 선보인 <하늘과 땅 사이 Ⅰ>과 84년의 작 <하늘과 땅 사이 Ⅱ> 그리고 90년 <해골 두 누드>라는 일련의 작품들은 그의 참여적 현실의식을 빗댄 알레고리와 상징성을 담고 있다. 그는 실제로 정치적 상황묘사를 작품화한다는 것이 자칫 예술적으로 실패하기 쉽다는 의구심과 조심성 때문에 미술로서 변혁운동 논리를 피해왔지만, 정치변화에 대한 관심이 깊고 또한 남다른 식견을 가진 작가이다.
그래서 그는 79년 <장군의 초상>이라는 작품에서 어둡고 삭막한 겨울거리를 유령처럼 배회하는 두 대머리 까진 사내의 음흉한 모습을 그림으로써 군부쿠데타로 조성된 시국 불안의 예감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를 보여 주고 있으며, 80년 광주항쟁에서 살아 남은 자의 슬픔과 분노를 그려야겠다는 예술가적 책무감에서 <하늘과 땅 사이>라는 연작을 발표한다. 그는 이들 작품의 습작과정에서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필적할 만한 웅대한 구도와 예술성을 의식했다고 한다. 그러나 욕심처럼 따라주지 못하였다고 실토한다.<하늘과 땅 사이>는 헐벗고 굶주리고 사지가 찢긴 시체들이 땅바닥에 끝없이 널려있는 모습이다. 이들 중에 살아 남은 몇몇의 남녀는 고개를 숙인 채 비탄에 잠긴 신음과 통곡 소리를 내고 있으며, 그 울부짖음이 잿빛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다. 모두가 한결같이 벌거벗은 누드 군상인데도 이미 생명이 없는 시체들이기 때문에 처참하고 참혹한 이미지들만이 보는 이의 뇌리를 강타한다. 아무런 배경의 설명이 없는 떼주검의 광경은 물론 광주비극의 알레고리를 상징한다. 살아있는 생명이 현실로서 의미를 상실한 누드군상을 그려 보임으로써 이 작가는 광주 죽음의 역사적 현실을 암시했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는 지옥 같은 비극의 냄새가 화면을 진동시킨다. 이러한 비극현실에 망연자실할 뿐 더 이상 작가는 할 말이 없었던 것 같다. 그 무렵 운주사의 석불을 소재로 그린 것이기는 하지만, 목 잘린 석불그림은 우연치고 너무도 시대적 상징을 암시하는 것 같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러나 이 <하늘과 땅 사이> 그림이 주는 당시의 충격과 역사적 증언의 기념성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아쉽게 느끼는 점은, 좀 더 광주현장의 실체에 접근하는 상황배경이라든가 죽음의 가해자며 피해자들의 실제모델에 대한 객관적 보도로서의 묘사가 미약하다는 사실이며, 나아가 이러한 주제그림에 대한 집요한 집착을 계속 보여줌으로써 더욱 완성된 작품과 비극이 비극으로 머물지 않도록 이를 극복하는 의식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 점에 대하여 강연균은 90년에 발표한 <해골 두 누드>라는 작품에서 자기 나름대로 답변해 보인다. 그것은 그에게서 보기 드문 우화적 그림이기도 하다. 산마루턱에 광주죽음을 상징화한 커다란 해골이 걸쳐 있는 그림인데, 그 산마루 해골을 중심으로 한편 산기슭은 돌들이 나뒹구는 황량한 죽음의 땅이라면 다른 한쪽 기슭은 생명이 움트는 초록의 풀밭으로 대비되어 있는 갈림의 위치를 보여 주면서 두 벌거벗은 싱싱한 젊은 남녀가 해골 위에 올라 앉아 두 팔을 별빛 찬란한 밤하늘의 허공을 향해 만세 부르듯이 힘껏 벌리고 있다. 마치 그것은 광주가 더 이상 죽음의 도시가 아니라 생명이 부활하는 부활의 도시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작가는 이러한 상징그림을 통하여 80년대 암울하였던 역사의 어둠을 빠져나오려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 주려고 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최근의 작품들에는 밝고 투명한 화면의 색조를 다시 강조하면서 형태의 날카로운 대비나 풍유적 상징보다도 자연적인 것의 조화나 균형의 아름다움에 더욱 치중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작가정신의 뿌리와 예술적 지향
최근에 그는 1,000호에 달하는 화폭 속에 천지가 보이는 백두산으로부터 금강산·설악산·무등산을 담으며, 아래로 지리산과 한라산의 웅장한 자태를 그려 넣고 그 사이로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인 양 하늘을 나는 옛 선녀상을 배치하고 있는 대작의 완성에 몰두하고 있다. 그것도 오랜만에 잡아보는 유화기법으로 시도하고 있는데 어쩌면 그의 왕성한 제작열을 과시하는 또 다른 걸작을 보여 주리라 생각된다. 강연균은 광주라는 도시에 살고 있지만, 그 곳의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고층빌딩이나 도시거리를 바삐 오가는 사람들, 자동차행렬, 산업화의 풍물 등등을 소재로 그리는 도시감성의 작가는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서울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도시적 모더니즘이나 리얼리즘에도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이 활동을 해온 점에서 그는 도시공간 밖의 농촌, 좀 더 정확히 말해서 호남지역의 자연을 무대로 한 삶의 리얼리티를 추구한 작가라고 요약할 수 있다.
산업의 발전으로 도시공간이 더욱 팽창되고 있는 반면에 상대적으로 농촌이 낙후되고 피폐해짐에 따라 점차 사라지고 있는 시골사람들의 쓸쓸함이나 소외적인 모습에 깊은 연민의 시선을 보내면서 뿌리뽑힌 고목의 정경을 즐겨 그린 데서 드러나듯이 인간생명의 본연의 뿌리를 어디에 두며 살아야 할 것인가에 그의 예술정신의 닻을 내려 두고 있다. 그래서 수없이 자연을 접하는 그림을 통해 조화와 균형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듯이 소박한 인간들의 삶 속에서도 그러한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마침내 인간생활과 예술이 자연처럼 일치되는 세계를 그는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수묵기법이 아닌 수채기법으로 보여 주는 점에서 전통적 한국화의 세계와 뿌리를 같이한다. 따라서 그가 강조한 자기 그림의 리얼리즘은 서양적 의미의 그것이 아니라 민족적인 것을 함축한다. 구태여 이름을 달자면, 생명적 리얼리즘 혹은 민족적 리얼리즘을 향한 길이라고 평자는 보고 싶은 것이다.
[출처] http://www.kcaf.or.kr/art500/kangyeongyun/review1_1.htm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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