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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매월리 이야기
WE/그리고 슬픈 일들

[백승종의 역설] 블랙리스트

by FELUCCA 2008 2010. 7. 24.

[백승종의 역설] 블랙리스트 
 

  
» 백승종 역사학자 
 
 이것은 차별과 억압을 위해 존재한다. 그 기원은 17세기 영국에 있다. 1649년 찰스 1세가 사형되었는데, 그 아들 찰스 2세는 부왕의 심판에 관계한 58명의 인사를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그중 13명은 처형됐고, 25명은 종신형을 받았다. 피의 보복이 끔찍했다.

 
명칭은 달랐지만 블랙리스트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양한 형태로 이어졌다. 로마 때는 집권자가 암살을 원하는 정적들의 명단이 있었다. 중국 송나라 때도 ‘당적’(黨籍)이란 것이 있었다. 가령 구법당의 사마광(司馬光) 등은 신법당이 재집권하자 당적에 기록되어 차별과 수모를 당했다. 조선 중종 때도 조광조 등 개혁파 선비를 망라한 기묘당적이 존재했다.

 

블랙리스트는 현대로 이어졌다. 20세기 초, 영국 기업가들은 노조원 명단을 만들어 놓고 채용을 거부했다. 히틀러의 부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정권 안보 차원에서 사회 각계 인사를 대상으로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악명을 떨쳤다.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도 그 가운데 끼었다. 1940년대 미국에서도 공산당을 박멸한다며 각계각층을 들쑤셨다. 영화계도 그 바람에 휩쓸렸다. 월트 디즈니와 로널드 레이건이 앞장섰다는데, 결국 채플린 등이 의회모독죄로 기소되었다. “할리우드 10인”이 그들이다. 그중에서도 돌턴 트럼보는 무려 10년 넘게 정식 취업을 못하고 가명으로 활동했다. 그래도 그의 펜 끝에서 <로마의 휴일> 같은 명화의 대본이 나왔다.

 

얼마 전까지도 후진사회에서는 블랙리스트가 맹위를 떨쳤다.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특히 악랄했다. 그간 온갖 블랙리스트가 횡행했던 한국 사회는 어떠한가. 악습이 여전한 것 같다. 최근 연예인 김미화씨가 ‘케이비에스(KBS) 블랙리스트’라는 것을 폭로했다. 이 때문에 그는 경찰 조사까지 받았다. 김제동씨 등도 이 명단에 들어 있다는 것 같다. <슬픈 리어왕>의 광대도 할 말 못할 말 다 했는데, 참 희한한 세상이다.

 

백승종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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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블랙리스트....]

 

1979-1980년 대학 본과 4학년시절의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1978년 본과3학년 때 치과대학의 총학생대표를 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에게는 당연했던 그리고 본3 2학기면 환자실습이 필수였기때문에 치과대학에 치과병원이 없어(그 때는 치과로만 존재) 실습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위기에 있었던것이다.

그래서 대학1회인 우리동기(본3)들이 교실문을 잠그고 소위 말하는 '데모'를 하여 당시 박철웅총장에게 병원의 신축개원을 강력히 요구하게 되었던것이다.

이 때 여학생 3명도 포함이 되어 있어서 문을 잠근 교실내에서는 여러가지로 힘들었었다.

 

당일 나를 포함한 본3과대표를 하고있던 박관수(순천)동기등이 김길*교수를 만나러 간사이 나를 놔 둔채 계획한대로 교실로 되돌아가 문을 걸어 잠근것이다. 후에 말하기를 박관수과대표는 "내가 데모장소에 같이있게 되면 일이 끝나고 나서 내가 대표로 징계를 당 할 수 있어 동기들끼리 논의하여 나를 빼돌렸다"고 하였다.

 

밖에 홀로 나와있던 나는 교실뒤 조그만 쪽문을 통하여 동기들의 소식을 쪽지로 듣고 빵도 몰래 넣어주고, 한편으로는 대학 총학생회를 통하여 우리의 치과병원개원 뜻을 총장과 재단에 전달하는데 힘을 썼다.

 

그러던 밤에(10-11시경) 2년 후배인 김ㄷㅍ후배에게 '안기부에서 연락을 받고 광주일보기자와 함께 우리쪽으로 오고있다'는 말을 전해듣고 교실에 있던 동기들에게 조속히 해산할것을 전달하였다. 학내문제를 정치화하여 잘못 불똥이 뛸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던것이다.

 

어찌됐든 그렇게 우리의 농성은 끝났고 총장이 우리의 뚯을 반영하는듯 바로 다음주부터 조대병원의 2층 일부를 확보하여 치과병원 공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규모는  우리가 바라는 그러한 공사는 아니였다.

그 해 학기초부터 나는 그 당시 전국적으로 서울에 3개대학(서울대, 연세대, 경희대) 밖에 치과대학이 없어던지라 비밀리에 해당대학 학생회장과 치과병원을 순방하면서 면밀하게 자료를 확보하여 우리대학병원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던 중이었고, 일부학생에게 자료를 몰래 전해주기도 하였었다.

병원공사를 바라보면서  첫술에 배부르랴하면서 마음을 달래기도 하였지만 너무 부족한 시설로 다시한번 때를 기다리자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던 중 조영필학장님(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이시고,  나를  학생장으로 적극 추천하셨던 분으로 나중에  학교를 떠나신 후에도 내박사학위 심사위원장으로 참여 해 주셨고  지금도 스승의 날에는 꽃을 보내 드리곤한다)께서 조용히 나를  불러 9월 말이나  10월초에 치과병원을 개원 할 예정이니 돈은 걱정하지말고 대대적인 축제를(광주에서 가장크게) 준비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마도 박철웅총장이 직접 전달한사항이지 싶었다.

 

우리 학생회에서는 이미 6월9일 치아의 날을 시작으로 연극, 관현악발표회, 사진전시회, 시민을위한 구강보건계몽 전시회, 체육대회, 카니발등  제1회 치호축전이라는 이름을 걸고 몇 달을 준비하여 타대학은 물론  광주시민을 대상으로 성대한 축제를 개최하여  지방에서의 첫 치과대학의 이름을  알렸었고, 학교 당국으로부터도 많은 성원과 격려를 받은 바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학장님께는 일단 알겠습니다라고 말씀 드리고 나서 그 후로부터는 학장님과 총장을 일체 면담을 회피하고 다녔다.

우리가 만족할 수준이 아닌 불만인 병원개축을 마냥 즐거워 할 수가 없었던것이었다.

그 때부터 내 개인의 불행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하였던것이다.

 

 

 

 

--계속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