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기사전송 2008-07-25 14:39
|
[오마이뉴스 임재성 기자] 25세의 청년은 예상보다 담담했다. 내부의 폭압적 문화가 힘들었지만 촛불집회가 아니었다면 어찌어찌 적응하며 복무를 마쳤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저항'을 하겠다고 한다. 외박을 나온 현역 의경 이길준씨는 부대로 복귀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촛불집회 막느라 고생했다고 받은 '특별'외박을 나와서 결정한 일이다. 더 이상 진압의 도구로서 존재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5월 31일에서 6월 1일로 넘어가던 그 새벽 청와대 앞 효자동. 시위대는 청와대 앞에서 밤을 새며 촛불을 들었고, 그런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물대포와 쇠곤봉이었다. 그날 그는 가장 앞줄에서 촛불들과 마주했다. 물대포를 쏘며 사람들을 광화문까지 밀어붙이던 그 아침, 그 역시 방패를 들고 뛰었다. 그리고 길바닥에 앉아서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가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양심이 하얗게 타들어가고 있음을 느꼈다고 했다.
영웅심이 아니라 자신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한 결정이라고 표현했지만 그의 앞에 놓일 수많은 고통과 역경에 가슴이 아팠다. 그는 부대 복귀일인 25일 오후 4시에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다. 기자회견 전날 밤 9시가 다 된 시간, 그는 어렵게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촛불집회에 함께하고 싶었던 의경
- 언제부터 의무경찰로 복무했나? 의무경찰을 지원했을 때, 시위진압에 나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 않았나?
"지난 2월부터 의무경찰로 복무했었다. 대학교를 2년 다니고 3년 정도 휴학을 하며 출판사나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일을 했었다. 소위 말하는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군대나 징병제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의무경찰 지원은 나름의 타협점이었다. 의경이지만 시위진압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복무할 수 있을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안이한 생각이었다. (의무경찰은 크게 방범순찰대와 기동대로 나뉜다. 이길준씨는 서울 중랑경찰서 방범순찰대로, 지역을 순찰하면서 주로 치안업무 보조를 맡았었다고 한다. 출동을 나가도 국가 주요 시설 주변을 순찰하는 거점근무를 해왔었다. 하지만 촛불집회에 동원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지난 5월 친구의 편지를 통해 밖에서 미 쇠고기 수입 문제에 대한 촛불집회가 진행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안에서는 뉴스나 신문을 잘 볼 수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 잘 몰랐고, 처음엔 다른 시위들처럼 '몇몇 사람들이 조금 하다 말겠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주말부터 출동을 나간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많이 걱정하지는 않았는데 그 전과 같은 거점근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 그 주엔 시위대와 멀리 떨어진 뒤편의 골목을 지키는 일을 했다. 그런데 보통 출동은 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그날은 정해진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 정기외박을 나가서 촛불집회에 직접 참여해 보았다. 사람들의 열기에 놀랐고 사람 목숨이 걸린 문제에 이렇게 무책임하게 나오는 정권에 분노하게 되었다. 함께 동참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결국 다시 복귀하면서 내가 이들의 반대편에 서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에 씁쓸했다. 하지만 그때도 난 진압이 아닌 경비만 서는 것이라 자위했다. 지금 생각하면 자기 합리화였던 것 같다.
귀대한 다음날부터 부대 분위기가 달라져있었다. 그날이 5월 31일이었다. 당시 나는 기동대 버스에서 별 생각 없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원 하차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진압복을 입고, 방패를 들고 어디론가 뛰어가라고 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정신없이 골목을 지나 달렸는데 그러다보니 내가 시위대와 마주보는 맨 앞에 있었다. 효자동쪽이었고 당시 대학생들이 앞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들 무언가 큰 일이 날 것처럼 긴장하라고 소리를 질러냈지만 도저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물대포가 온다는 소리를 듣고 정신이 들었다. '설마 쏘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했다. 물대포는 2시간 넘게 기다렸다. 명분을 얻기 위해 시위대의 선제공격을 기다렸던 것이다."
"때려라, 하지만 보이지 않게 때려라"
"시위대의 선제공격을 기다렸다는 판단이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냐"고 물어봤다. 그는 "시위대가 꼬투리 잡힐 행동만 하기를, 즉 물대포를 쏠 명분이 생기기를 기다렸던 것이 당시의 지배적인 분위기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위관들이나 선임들이 의경들에게 어떻게 교육시키는 가를 말해주었다.
"때려라. 때리는데 보이지 않게 때려라. 요즘에는 다들 카메라가 있으니 엄하게 찍히지 말고 방패를 살짝 들어 정강이를 차라."
물대포를 쏘면서 진압은 시작되었다. 수많이 이들이 벌겋게 아침 해가 뜬 광화문 거리에서 피 흘리며 쓰러져간 그날 아침이었다.
"물대포를 계속 쏘다가 순간 앞으로 나가라고 했다. 뒤에서 밀어대니까 정신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사람들을 밀고 밀어서 결국 광화문까지 밀어냈다.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진압을 했다. 끝나고 나서 길바닥에 앉아있는데 내 인간성이 하얗게 탄 것 같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었다. 물론 시위대 중에는 폭력적으로 저항을 한 사람도 있었다. 나도 소주병에 맞기도 했는데 그게 전혀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비무장이고 난 방패를 들고 진압복을 입을 상태에서 소리를 지르며 뛰어갔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이 시민들에게는 큰 공포였을 것이다."
소리를 크게 지르지 않으면, 살기 등등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부대로 돌아가 얼차려를 받는다고 했다. 의경사회 내의 폭력적 문화는 그 어떤 현역 군인보다 심각하다. 내부가 인간적이지 않기에 외부를 보는 시선 역시 바뀔 수밖에 없다.
그는 "의경 내부의 지배적인 분위기는 시위대는 자신을 피곤하게 만드는 적이며, 그 적을 빨리 쓸어내는 것은 그저 업무로서 여긴다"고 전했다. 진압 지침은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고만 만들지 말고 진압하라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국가는 20대의 젊은이들을 자신의 권력을 위한 도구로 거리에 세우고 그들은 점점 더 시위대를 항해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진압의 도구에서 양심의 주체로
"진압이 끝나고, 선임에게서 폭언을 들으면서 깨달았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으며, 내가 안일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6월 내내 집회를 막는 것에 동원되었고 계속 철야였다. 몸이 힘든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내가 하고 있는 무의미한 행동을 견딜 수 없었다.
나와 똑같은 시민들을 향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얼마나 정당성이 없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시위대가 피켓만 들고 내 방패 앞을 지나가도 힘들었다. 지나가면서 경찰들에게 야유를 던지는 사람들이나 항명하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가슴을 후벼 팠다. 헬멧을 쓰고 있을 때 안보이게 울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처음에는 도피를 시도했었다. 다치면 시위진압에 나가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다리를 부러뜨리려고도 했다. 다른 부서로 옮길 수 없을까 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다 잘 안되었고, 그렇게 보낸 6월은 너무나 길고 힘들었다. 다행히 6월에는 직접 시위대 해산이나 진압이 아닌 길목을 막고 있는 역할이어서 버틸 수 있었던 거 같다.
7월로 넘어가면서부터 도피가 아닌 저항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늘 타협만 하고 살아왔다. 하지만 이번만은 저항을 하고 싶었다. 만약 이번에도 타협을 한다면 앞으로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았다. 당당하게 살고 싶은 좋은 '이기심' 같은 것을 느꼈다. 이번 촛불집회는 스물을 갓 넘은 청년들이 얼마든지 권력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런 이상 그것을 유지하는 일에 복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폭력 악순환 끊으려면 전의경제 폐지해야"
그는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떤 기자회견이며, 기자회견 이후에 쏟아질 비난들이 걱정되지 않은가를 물어봤다. 분명 사회는 그에게 군대 가기 싫어서, 군 생활에 적응을 못해서 저런다는 비아냥거림을 퍼부을 것이다.
"많이 알리고 싶다. 그러나 흔히 운동권이 하는 전략적인 사고가 아니라 그저 사람들이 보다 많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전의경 중에도 나 같은 사람이 있음을. 그리고 내부 고발자로서 그 안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운영되고 있은가를 드러내고 싶었다. 또 젊은 애들을 사지에 내몰고 시위대와 충돌하게 만드는 정부에게 항의하고 싶었다.
기자회견은 '전의경제 폐지를 위한 연대'에서 활동하시는 분들과 연락이 닿아서 함께 준비하게 되었다. 아직 구체적으로 어떤 주장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지 못했다. 거창한 주장을 하기 보다는 그저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지금 생각하는 정도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어디선가 숨죽여 고민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 계속 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
내부의 폭압적인 문화는 분명 내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촛불집회가 아니었다면 이런 결정까지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지금과 같이 어찌어찌 적응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애들 좀 덜 괴롭히는 선임이 되지 않았을까."
- 촛불집회 동안 내부의 상황이 이전보다 더 폭압적으로 변해갔는가?
"촛불집회 이후로 6월, 7월 이후 내부 분위기가 험악해져 있었다. 애들을 긴장을 시키고 군기를 잡는다는 명목이었다. 시위 출동 전후에 버스 안에서 얼차려 받거나 맞기도 했다. 촛불집회가 계속될 수록 내부의 구타나 가혹행위가 심해졌다. 7월에는 매일 맞은 거 같다."
그는 이 부분에서 말을 극도로 꺼렸다. 자신의 결정으로 다른 누군가가 피해를 입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구조의 문제'라고 표현했다. 그렇기에 그는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되는 전의경제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구조의 문제로 돌리진 않았다. 그는 분명 지금의 전의경들이 선택하고, 저항할 수 있으며, 그러길 바란다고 했다. 어려운 길이지만 자신의 결정이 그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었으면 한다고 했다.
"부모님이 겪으실 고통에 마음 아파"
마지막으로 부모님이 이 사실을 아시는지 물어봤다. 이 결정이 감옥행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부모님이 받아들이실 수 있을지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밤이나 내일 아침에 말씀드리려고 한다. 아마 절대 이해해주시지 못할 것이다.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는 말씀을 드리겠지만 사실 자신이 없다. 내가 당하는 힘듦이나 고통은 내가 선택한 것이기에 받아드릴 수 있지만 나로 인해 부모님이 겪으실 고통을 생각하면 정말 죄송스럽고 마음이 아프다."
그는 기자회견이 끝난 후 종로5가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농성을 시작한다. 복귀시간인 저녁 8시가 지나면 헌병대가 그를 잡으러 올 것이다. 멀쩡한 사람들도 출국금지에 수배까지 시키는 마당에 기자회견까지 한 미복귀 현역 의경을 잡아드리기 위해 어떻게 나올지는 뻔한 일이다. 힘 있는 이들은 그의 전적과 의경복무 기록을 탈탈 털어내서 어떻게 하든 이길준을 '나쁜놈'으로 만들려고 혈안이 될 것이다.
우리가 안아줘야 하지 않을까. 촛불을 들고 싶었지만 방패 뒤 헬멧 속으로 눈물만 흘렸던 이 청년을. "부모님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자신이 감옥에 가는 것이야 가겠지만 부모님께 죄송해서 어떻게 하냐"는 이 청년을. 결국 자신에게 가해질 그 비난과 처벌을 눈앞에 뒤고 있는 이 청년을.
[출처] http://news.empas.com/issue/show.tsp/cp_oh/5606/20080725n12696/ |
'WE > 그리고 슬픈 일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8올림픽] 박주영 "이탈리아, 기술 등 모든 면에서 앞서" [올림픽 축구] (0) | 2008.08.11 |
---|---|
[김선주칼럼] 아무리 돈이 제일이라지만 … (0) | 2008.07.31 |
[왜냐면] 광우병! 그 어마어마한 공포 / 박성숙 (0) | 2008.07.25 |
[뉴스] 미셸 위, 또 다시 '실격'… 날아간 '부활' (0) | 2008.07.21 |
[한겨레프리즘] 보수도 우익도 아닌 정권 / 고명섭 (0) | 2008.0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