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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그리고 슬픈 일들

[한명숙 미니자서전 5] 구원의 소리

by FELUCCA 2008 2009. 12. 14.

[미니자서전 5] 구원의 소리

2008/03/20 11:37 | Posted by 한명숙

 

 

 

 

1979년 11월 13일 그 날의 기온은 영하 13도였다. 내가 구치된 서울구치소에는 난방장치는 물론이며 온기가 퍼질 불씨라곤 단 한군데도 없었다. 정치범인 나는 독방에 구치되어 서로의 체온을 나누어 가질 동료조차 없었다. 고문으로 망가진 나의 가냘픈 몸뚱이를 쩍쩍 갈라터질 듯한 맵고 아픈 추위가 파고들었다. 내가 입고 있던 푸른 수의는 처절한 추위를 막아주기에는 너무도 얇았다. 깊은 잠에 빠져 잠시라도 추위를 잊고 싶었지만 시간은 더디 가고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깜빡 자다 소스라치게 깨어나면 매서운 칼바람의 울음이 옥방을 스쳐갔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추위와 싸우다 보면 어느덧 어둠이 걷히고 하얗게 동이 터왔다. 머리맡에 놓아 둔 자리끼는 꽁꽁 얼어붙어 정오의 햇살이 옥창을 넘나들 때 쯤 간신히 녹았다.

 


그렇게 암울한 시간은 계속되었고 그 속에서도 나는 조금씩 기력을 찾고 자신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나를 한없는 절망의 끝 언저리에서 건져 준 것은 여동생 한이숙이 넣어 준 한 권의 책이었다. 그 책은 본훼퍼의 옥중서간집이었다. 디트리히 본훼퍼, 독일의 신학자이자 목사이다. 나찌 정권에 대항하다 결국 게슈타포에 붙잡혀 형무소에서 수감되었지만 종전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 끝내 총살을 당한 실천적인 종교인이었다.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 내가 매 맞는 것, 내가 죽은 것, 이것이 그리 심한 고통은 아니다. 나를 참으로 괴롭게 하는 것은, 내가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동안 밖이 너무 조용하다는 사실이다."

본훼퍼의 이 한마디는 나를 천 길 낭떠러지에서 건져 올려주는 동아줄이 되었다. 나의 처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극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신앙을 꿋꿋이 지키며 고통을 이겨 내어 결국 승리의 세계를 열어가는 본훼퍼의 글은 너무나 큰 감동의 울림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마음이 약해지려고 하면 다시 읽곤 하였다. 특히 재판을 받으러 나가는 날은 꼭 그 책을 읽고 마음의 무장을 다시 했다.

조금씩 몸과 마음이 회복되었지만 가끔씩 발작처럼 찾아오는 호흡 곤란증과 외로움은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겨울은 깊어만 가고 교도소에도 어김없이 성탄절은 다가왔다.


 

 

1979년 12월 24일 성탄전야. 내 인생에 차마 잊혀지지 않는 소중하고 고귀한 성탄전야이다. 성탄이 다가오자 나는 더 외로워졌다. 가족과 동지들이 사무치게 그리웠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외로운 밤을 보내고 잊을 남편이 너무도 보고 싶었다. 난 그리움이 얼마만큼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새삼 깨달아야만 했다. 지난 시절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목젖이 울컥거리며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이 소리 없이 베개를 적시고 있었다.

그 때 꿈결처럼 아득한 울림이 들려왔다. 그 울림은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목소리가 차가운 겨울바람을 타고 아련하게 울려오고 있었다. 난 마치 감전이라도 된 사람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점점 또렷해지는 소리를 따라 방 옆에 붙어있던 악취 풍기는 변소로 들어갔다. 두 손으로 옥창의 창살을 부여잡고 세상 밖으로 귀를 내밀었다. “한명숙, 한명숙. 힘내라!”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수인번호가 아닌 살아 있는 사람 나, 한명숙을 부르고 있었다. 나를 부르는 그 소리는 겨울바람에 실려 새벽의 정적을 깨트리며 나의 귓전을 힘차게 울렸다. 동지들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동지들의 목소리였다. 동지들은 성탄 새벽, 교도소의 뒷산에 올라 갇혀있는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합창했던 것이다.

조금 후 멀리서 옥에 갇힌 우리를 위해 불러주는 동지들의 크리스마스 캐롤이 성탄의 새벽을 잔잔하게 깨우고 있었다. 나는 내 평생 그렇게 아름답고 강렬한 성탄 메시지를 들어 본 적이 없다. 한명숙! 이 이름 석 자에 담긴 동지애가 빛을 잃고 어두운 절망 속에서 좌절해 있던 나를 극적으로 소생시켰다. 나는 악취가 코를 찌르는 옥방의 창살에 매달려 그 매서운 겨울바람을 온 몸으로 고스란히 받으며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성탄의 새벽을 맞았다. 나는 그 날 나를 불러 준 동지들의 목소리에서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내 곁으로 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이후 나를 짓누르던 외로움과 호흡곤란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조금씩 몸과 마음이 회복되었지만 가끔씩 발작처럼 찾아오는 호흡 곤란증과 외로움은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겨울은 깊어만 가고 교도소에도 어김없이 성탄절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