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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매월리 이야기
WE/그리고 슬픈 일들

[한명숙 미니자서전 7] 노란손수건

by FELUCCA 2008 2009. 12. 14.

 

 

[미니자서전 7] 노란손수건

2008/03/20 11:35 | Posted by 한명숙

 

 

1981년 8월 15일.
나는 광복절에 특사로 석방되었다. 2년 6개월만의 석방이었다. 나를 고문하고 핍박했던 박정희 정권은 이미 무너지고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염원했던 민주화는 아직 이 땅에 실현되지 않고 있었다. 독재 정권이 무너진 그 자리를 대신하여 신군부가 더 교묘한 방법으로 국민의 삶을 옭죄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방의 기쁨과 싸움의 대상이 사라졌다는 허탈감 보다 새롭게 싸워야할 상대에 대한 경계심이 마음을 어둡게 했다.  

 출옥 당시 나의 건강은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일단 몸을 추슬러야 했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감옥에 있는 동안 더욱 공고해지고 확연해졌다. 그 때부터 요가를 통해 몸과 마음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 난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암울했던 80년 초의 시대적 부조리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과 아직 감옥에 남아 있는 남편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내가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난 남편의  옥바라지를 열심히 하는 것이 나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도소 경험 이후 내 생각은 바뀌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그토록 비인간적인 감옥생활을 10년 이상 강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난 남편의 석방운동을 시작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남편은 정치범이었고 한국의 정치적 상황은 여전히 정치범에 대해 가혹할 만치 혹독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남편의 석방은 비단 나의 개인적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권과 관련된 시대의 양심을 되찾는 일이었다. 

나는 시인 김지하씨의 도움으로 가톨릭의 지학순 주교를 소개받았다. 나와 남편이 살아 온 신산한 삶을 고해하듯 말씀드렸다. 남편과 같은 청년을 10년 이상 구속하는 것은 인권 유린이라고 판단한 지학순 주교는 흔쾌히 남편의 석방을 도와주겠노라 약속했다. 지학순 주교는 당시 민주화운동의 리더 중 한 사람이었으며 한국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분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12월 20일이 될 때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난 4개월간의 석방운동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돌아 올 성탄절과 세밑의 축제 분위기가 너무 싫었다. 모두가 병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아파하지 않는 현실이 너무 가슴 아팠다. 나는 단식을 하기로 했다. 남편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온기 하나 없는 차디 찬 감방에 있을 남편을 생각하자니 따뜻한 방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웠다. 물만 마시고 일주일을 견디기로 했다. 하지만 몸이 너무 쇠약해진 까닭에 단식 닷새째 되는 날 난 자리에서 일어 날 수조차 없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탈진 상태였다.  

1981년 12월 24일 저녁, 단식으로 거의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있을 때 중앙정보부로부터 전화가 왔다. 박성준씨가 25일 석방되니 가족이 교도소까지 마중을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그가 돌아온다. 나의 키다리 아저씨, 나의 동지이자 내 사랑의 총합인 박성준, 내 남편이 돌아온다. 빨간 넥타이를 한 채 쑥스럽게 미소 짓던 첫 데이트 때의 남편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러나 단식 탓에 솟아오르는 기쁨을 표현할 기운이 없어 누운 채 조용히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오래 기다렸던 일인가! 13년 6개월만의 만남이다. 준을 맞으러 가족과 함께 집을 나섰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한걸음에 달려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난 미처 집을 나서기도 전에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리던 남편이 석방되던 날, 나는 그를 맞으러 가지 못했다.

1981년 12월 25일 오후 2시, 남편은 13년의 기나긴 형기를 마감하고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스물일곱 청년의 모습으로 나를 떠났던 남편은 이제 마흔 한 살의 중년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나 역시 어여쁜 새색시에서 중년을 바라보는 서른일곱의 아낙이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