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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매월리 이야기
WE/그리고 슬픈 일들

[한명숙 미니자서전 3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일어서라

by FELUCCA 2008 2009. 12. 14.

[미니자서전 3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일어서라

2008/03/20 11:37 | Posted by 한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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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6개월의 짧은 신혼생활의 추억만을 남겨 둔 채
내 곁을 떠났다. 나는 이제 혼자다. 운동의 동지이자, 삶의 친구였으며 사랑하는 애인이었던 나의 님은 가고 나만 혼자 남았다. 지구상에 나 혼자만 버려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좁아만 보였던 신혼방은 시베리아 벌판 보다 더 황량하고 추웠다. 슬프다고 생각하지 말아야한다는 생각이 나를 더욱 슬프게 했다. 사람의 눈물이 마를 수 있다는 걸 난 그 때 알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슬픔에 겨워 있을 순 없었다. 난 비록 혼자지만 이제부터 두 사람의 인생을 살아야 했다. 차디 찬 감방에서 젊은 꿈을 사장 당하고 있는 나의 동지를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살아야만 했다. 나는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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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갇혀있던 대전교도소는
일제시대에 정치범 수용을 위해 지어진 곳으로 서울에서 약 세 시간 거리에 있었다. 나는 남편이 수감되던 그 날부터 출옥하는 그 날까지 (교도소 규정에 따라) 단 한 번의 어김도 없이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쓰고, 한 달에 한 번씩 면회를 갔다. 남편 역시 일주일에 한 번씩 붙여오는 답장을 단 한 차례도 빠트리지 않았다. 비록 교도소의 검열을 거쳐 서로의 생각을 온전하게 전달할 순 없었지만 남편과 나의 옥중서신은 13년 동안 서로의 이상과 사랑을 오롯하게 확인할 수 있는 창구였다. 

우리의 편지는 남편과 나를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통로였으며 사랑을 확인시켜주는 강한 끈이었다. 우리의 못 다한 사랑과 시대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분노와 희망이 온전하게 편지에 실려 있었다. 우린 편지만으로도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었으며 서로에 대한 믿음과 철학까지 공유할 수 있었다. 나는 남편의 편지를 먹고 사는 새댁이었다. 그리고 점점 더 강하고 맹렬한 투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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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  1970년 이화여대 사감을 지내던 나는 학생들의 시위를 지원하다 결국 직장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새롭게 직장을 옮긴 곳은 크리스챤 아카데미였다. 그리고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나의 인생을 뒤 바꾼 두 번째 계기가 되었다.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당시 한국사회에 산재해 있던 갈등과 사회적 문제를 해소하기위하여 창설되었지만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중간자적 중재자를 양성하는 데 그 실질적인 목표를 두고 있었다. 노동자, 농민, 여성, 학생, 종교를 다섯 계층으로 나누어 집중적인 중간집단 교육을 실시했다. 나는 당시 여성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중간집단 여성교육 과정에 오히려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은 교육생 보다는 나 스스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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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에서 나는 너무도 소중한 동지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여성노동자, 여성농민 등 가난하고 소외 받는 여성들과의 만남을 통해 얻은 감동은 나를 지금까지 지탱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 중 하나다. 그 때 만난  분들은 지식인 여성들과 더불어 한국 진보 여성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6년 동안의 교육은 실질적인 한국 민주화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무렵 어쩌면 난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절인지도 모른다. 배가 고플 정도로 가난했으며 남편이 출옥될 가능성은 단 1%도 없었고, 서슬 퍼런 독재정권은 살벌한 감시의 눈길을 한시라도 거두어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참으로 씩씩하고 용감했다. 어머니가 사다주신 평화시장의 싸구려 티셔츠와 까만 바지를 입고서 거침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누비며 헤집고 다녔다.

나는 매사에 감사했으며 작은 일에도 크게 기뻐했다. 그 어떤 어려움도 세상을 바르게 살아간다는 자부심과 불의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정의감으로 이겨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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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독재정권의 마지막 발악은
나와 우리의 자부심과 자신감을 한 순간에 깨트려버렸다. 1979년 박정희 독재정권 말기 결국 나를 포함한 여덟 명의 동지들은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으로 구속되고 말았다.